 서울(과천)경마장의 터줏대감은 朴元善(박원선·62) 조교사이다. 1945년 해방 직후인 일곱 살 때부터 말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한국 경마의 과거와 현재를 꿰뚫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朴元善 조교사는 그의 馬房(마방)으로 두 번 찾아 간 필자에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한국 경마의 秘話를 주섬주섬 들려 주었다.
그와 경마의 숙명적 만남은 서울 신설동 경마장의 기수로 뛰던 그의 형 朴元鳳(박원봉 )이 고향인 황해도 延白(연백)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그의 부모와 동생들을 서울로 불러올림으로써 시작되었다. 朴元鳳은 일제 때 만주에서 말 타는 기술을 배웠는데,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기수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朴元善은 신설동 경마장 구내의 기수 사택 에 이사를 온 뒤 마구간에 가서 말과 더불어 자랐다. 그러니까 철부지 때부터 마구간 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간혹 말잔등에도 올랐던 것이다. 6·25동란 후인 1954년, 신설동 경마장 시대가 끝나고 뚝섬 경마장 시대가 개막되었다. 朴元善은 17세의 나이로 견습기수가 되었다. 당시엔 요즘처럼 기수양성학교가 없었다. 조교사 밑에서 3~4년 동안 매를 맞아가며 말 일을 돕다가 소질을 보이면 견습기수로 출전하던 시절이었다.
6·25동란 직후 경마팬은 얼마 되지 않았고 매출액도 보잘 것 없었다. 저마다 살기가 바빠 경마장을 찾는 팬은 하루 수백명 정도에 그칠 때도 많았다. 出走馬(출주마)는 제주도 조랑말이었다. 말이 부족해 금요일에 뛴 말이 하루 쉬고 일요일에 또 出走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는 한 사람이 馬主, 조교사, 騎手, 관리사를 겸하기도 했다 . 벌이도 신통치 않아 밥 먹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경마 관계자라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던 「인간적 경마시대」였다. 마사회장이나 馬主들이 조교사와 騎手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고기를 구워 먹이는 등 가족처럼 대했다.
자유당 집권시절인 1950년 대 말에는 林和秀(임화수), 柳志光(유지광 ), 조을성 등 정치깡패들이 경마장에 들락거렸다.
한일극장의 주인 임화수, 동대문시 장의 제2인자 조을성은 경마에 단단히 재미를 붙여 스스로 馬主가 되기도 했다. 『임화수 등 주먹들이 승부 조작으로 딴 현금을 가마니에 집어넣어 갔다는 등의 소문은 훗날 지어낸 얘기 』라고 朴元善씨는 말한다.
『그들이 돈에 욕심을 낸 것이 아니라 경마를 즐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경마장에 돈이 얼마나 돌았다고 거둬 갈 게 있었겠습니까? 주먹들의 성격이 거칠긴 했지만 , 화통했고, 화가 나 씩씩거리다가도 금방 풀어지더군요』
당시 뚝섬 경마장 제1의 인기마는 호주 산 去勢馬(거세마) 「신속도」. 이 말의 기수가 朴元善이었다. 신속도가 20전 20승을 기록할 만큼 너무 잘 뛰는 바람에 그후 경주에 나설 수 없었다. 한 레이스에 고작 5~7 필이 뛰었는 데다 그 중에는 다리를 저는 이른바 「똥말」들도 섞여 있어서 「신속도 」가 나서면 승부가 너무 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속도는 놀기만 했는데도 신속도의 馬主는 한 달에 한 번씩 1등 상금을 받아 챙겼다. 그러다가 신속도는 승마구락 부의 승마용 말로 팔려 갔다.
그러던 1년여 만에 신속도는 뚝섬경마장으 로 되돌아와 「龍門山(용문산)」이란 바꾼 이름으로 출전했다. 원래 경주마의 이름은 한번 정해지면 고칠 수 없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용문산은 컴백해서도 한동안 위용을 떨쳤다. 어느날 1700m 제3경주에서 朴元善은 너무나 기고만장한 나머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때만 해도 발주기가 없었다. 스타트 라인에는 배구 네트 같은 것이 걸려 있었고, 출발 신호와 함께 배구 네트가 위로 쑥 올라 가면 말들이 일제히 뛰어나가는 식이었다. 다른 말들은 스타트 라인에서부터 질주하는데, 용문산은 速步(속보) 정도로 나갔다 . 기수 朴元善이 1착을 낙관하고 일부러 용문산의 고삐를 당겼기 때문이었다.
선행마들이 제2코너를 돌 무렵에야 朴元善 은 追入(추입)에 나섰다. 그만큼 자신만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우승마에 4분의 3 馬身(마신) 차이로 패배했다. 1마신이 2.4m이 니까 1.8m 차이로 2착을 했던 것이다. 「용문산」의 조교사인 형 박원봉이 펄펄 뛰었 다. 그 자리에 있었다간 맞아 죽을 것만 같아 朴元善은 기수복을 입은 채로 신설동 집으로 도망쳐 사복으로 갈아입고 가출하여 며칠간 꽁꽁 숨어버렸다고 한다. 이날 사고로 朴元善은 1주일간 騎乘 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당시 경마시행일은 1주일에 금, 토 , 일 3일간이었다.
한국 경마 발전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은 1963년 12월부터 1970년 3월까지 마사회장을 지냈던 金德勝(김덕승)씨다. 김덕승 회장은 통이 컸다. 『조교사와 기수들이 고생한다』면서 가끔 番外(번외) 경기를 해서 생긴 돈으로 마필관리자 전원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 이런 金회장의 배경에 대해 朴元善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덕승씨는 해방 전 滿洲(만주)에서 朴正熙 장교(滿軍)와 친교가 있었고, 5·16 때는 뒤에서 거사 자금도 댄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다음 해인가 , 어떻든 朴대통령이 뚝섬경마장을 한번 다녀가셨습니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유일한 경마장 방문이었지만, 경마를 보러 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뚝섬 경마장 구내에 있던 슬라브 지붕 건물에 직행하여 오랜 친지인 김덕승 회장과 소줏잔을 기울였다고 들었습니다』
김덕승 회장은 華僑(화교) 자본을 빌려 외국에서 경주마를 사오게 하는가 하면 김치곤씨라는 분이 자본주인 德馬實業(덕마실업)을 끌어들여 자금난에 허덕이던 마사회를 대신하여 單一馬主(단일마주)가 되게 하는 등 한국 경마의 맥을 이어 갔다. 당시 최고 인기마는 외국산 말들을 제친 제주도 조랑말인 春光(춘광)이었다. 춘광은 「거리 핸디」를 먹고 출주할 정도였다. 1700m 경주의 경우 춘광만은 100m가 더 먼 1800m를 달렸다. 그런 경주에서도 춘광은 4착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하루 열두 번씩 경주했는데, 경주마가 부족하여 하루 두 번 뛰는 말도 있었다. 말은 한번 出走하면 적어도 1개월 간 휴식과 훈련을 거쳐 다음 경기에 出走해야 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다 일본산 한 살짜리 어린 말 60필을 도입했다. 말은 두 살이 되어야 出走할 수 있다. 이어 일본의 경마장에서 出走한 경력을 지닌 말 30필도 수입되었다. 그래서 뚝섬 경마장에서는 「후라와세유」 「도키노락키」 등 일본 이름의 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마는 예비역 육군 중장인 李建榮 (이건영)씨가 1982년 1월, 제20대 마사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급격히 커졌다. 그의 在任 초기 어느 날, 하루 매출액이 5억원을 돌파하였다고 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그는 마사회장으로 6년간 재임하면서 오늘의 과천경마장 건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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